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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5년 전 봄,
난 그리스 아테네에서 산토리니 섬으로 들어가는 야간 페리를 타고 있었다.
유럽도 오스트리아 빈이나, 남유럽 바닷가는 꽤 추웠다.
더군다나 야간 페리를 탔으니 얼마나 추웠는지.
(비수기라서 배 안의 seat 석이 비어 들어가도 되었지만, 난 원칙주의자라서 더더욱 열심...)
아직도 추울 때면 빈과 산토리니 야간 페리는 늘 기억난다.
추울 때를 대비해서 인터넷 쇼핑으로 사 간 핫팩(그 당시 각 1,000원/7개 가량) 이 어이없게도 모두 불량이었다.
추운 데 손난로(그 때는 핫팩보다 손난로라는 명칭이 더 익숙했다) 를 흔드느라고 내 손만 더 얼어붙고 말았다.
비싼 돈 주고 산 손난로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 것은 물론, 당장 판매자에게 따질 수도 없다.
반품이나 교환도 지금은 어렵고, 눈 앞에 닥친 추위 앞에 믿었던 손난로의 배신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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난 매 주 목요일 아침에 꼭 산책을 한다.
영하권의 추운 날씨에도, 건강을 위해 하곤 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집에 쟁여놓은 핫팩을 꺼냈다.
오전 7시여도 워낙 추워서(영하 11도에 강변이라 체감온도는 더 낮고 얼음 얼었다) 핫팩을 흔들며 데우려는 시도를 하는데,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.
거무칙칙한 활성탄만 손에 묻고, 완전 불량이다.
덕분에 손만 얼어붙고 동상 걸리기 직전까지 붉게 물든다.
***
난 오늘 불량 핫팩을 버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.
내가 15년 동안 가르쳐 온 이들이(아이러니하게도, 유럽을 다녀온 직후 시작했다) 대부분은 물론 잘 따라오긴 했지만, 영어 수학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배우며 삶으로 적용하고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 관계로 그 교육이 더 어려운 과제였다고 고백한다. (나도 영어 수학을 가르쳐 봤으니까)
아무래도 행동과 삶의 변화를 하기란 결코 쉬운 게 아니다.
때로는 그를 위해 울고, 안타까워하는 맘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해도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과 얼어붙은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.
마치 불량 핫팩처럼,
날씨도 추운데 뎁혀보겠다고 데워지지도 않는 핫팩 흔들며 갖은 노력을 해 보아야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.
그제서야 포기하고 버려두고 가야만 한다.
후폭풍이 있다.
검은 활성탄이 내 손에 묻고, 따뜻하게 해 보려고 어미새가 품듯, 잠바 주머니에 넣었더니 안감에도 묻어 시간이 지나도 계속 묻어난다.
그 악한 영향력이 삶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.
아무리 흔들고 깨워도 부드러워지거나 따뜻해지지 않는 마음.
나도 사실 내 역할을 다 했기에 그렇게까지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된다.
끽해야 92원짜리 핫팩, 버리고 새로 뜯으면 그만이지만.
누가 알아주기나 할까?
따뜻하도록 만들기 위해 추위에도 흔들고 깨우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.
내 손이 부르트고 얼어 붉게 물들어도, 살이 트고 피가 맺힐 정도로.
만신창이. 피투성이. 엉망진창.
하지만 돌아온 것은 믿음에 대한 배신과,
적반하장. 배은망덕.
아, 추위에 떨고 있는 내 자신은 차치하고라도 그간 믿고 의지했으며 들인 노력과 투자한 시간은 아까워서 어쩌나.
이걸 어디다가 하소연 해야 하는 걸까.
남들은 쉽게 얘기한다.
'싸구려 핫팩, 버리고 다른 거 뜯으면 되잖아요.'
집에 와 그렇게 해 보니, 새로운 다른 핫팩은 몇 번 안 흔들었는데도 벌써 온기가 있다.
그러고보면 내가 참 정 때문에 외로이 홀로 버티던 시절이 길긴 했다.
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쉽게 버릴 수 있었겠는가,
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데.
그래도 흔들고 버티고 깨워 온 오랜 세월이 있는데.
시간이 아까워서라도, 내 최대 약점인 정 때문에라도.
하지만 이제는 버려야만 한다.
내 손에 얼룩이, 거무댕댕 활성탄이 묻고.
새로이 내 손을 잡으려는 이들을 위해서라도,
맹추위에도 신뢰했던 내 믿음을 배신한 채, 더워지지도 온기를 내지도 않는 불량 핫팩은.
난 내 역할을 충실히 했고, 남들 이상으로 정에 얽매여 끊어내거나 버리지 못하고 몸과 마음과 시간과 돈을 쏟았으니.
내 스스로에게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우리만큼 최선을 다 했다.
미래의 나에게 떳떳하고 칭찬받을 자격이 충분하다.
하늘을 우러러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.
그러니,
잘 가라.
올 겨울, 성탄절엔 불량 아닌 핫팩이 pick 되길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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